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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는 왜 쓰레기를 줍는가? 카르마(karma)란 실재하는가?

RA/n 2025. 5. 2. 14:37

카르마 (कर्म)를 한자로 업(業) 또는 업보(業報)라고 옮겼다. 갈마(羯磨)라고 음역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업은 생각이나 말·행동으로 지은 원인, 업보는 그런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를 뜻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 쪽 종교에서는 윤회와 함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작용한다. 산스크리트어 문헌에서 비종교적인 용법으로는 '어떤 일을 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 사람이 지금껏 걸어오며 행한 행적들은 선한 업이든 악한 업이든 모두 업이므로 해당 인물의 선과 악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사람이 손에 권총을 쥐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는다. 손가락을 당긴다. 손을 뗀다.

여기서 각 행위는 한 순간에 일어나 찰나에 사라진다. 총구에서는 탄환이 발사되고 상대방이 쓰러진다. 이렇게 상대방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시체가 남는다는 결과가 생긴다. 또한 그 시체를 처리하는 행위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원인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결과로, 또한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또다른 행위로 이어진다. 이처럼 업, 즉 카르마는 쇠사슬처럼 이어져 끝나지 않고 이어지게 된다.

 

 

카르마는 정말로 실재하는걸까? 그러니까 정말로 올바르게, 착하게 살면 나에게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오는걸까? 이와 같은 이유로 만찢남으로 유명한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 는 경기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 tiktok https://www.tiktok.com/@mlb/video/7224969359364525358

 

   이 세상은 인과론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인과율이란, 모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내가 똥을 쌌으면 그건 소화가 다 되었기 때문이고, 소화가 다 되었다는 것은 내가 무언갈 먹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물리학에서, 또는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있다. 물론 각 분야마다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한 부분(how와 why의 차이정도 이다)은 당연히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개념적 본질은 동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르마(karma)란 인과론적인 관점에서 '내'가 긍정적인 원인을 제공한다는 관점에서의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카르마를 믿고 올바르게 살면 과연 좋은 결과가 마치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까? 

 

  세상과 '나' 라는 객체는 수 많은 '관계'를 통해 얽혀있다. 여기서 얽혀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얽힘' 현상과 매우 유사하다. 세상, 아니 이 지구 속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동시간 속에 살아가고있다. 하지만 '나' 라는 존재는 수 많은 생명들의 집합 속의 하나 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얽혀있는 관계를 통해 상호작용 하며 서로를 인식한다. 예를 들어, 서울에 살고있는 홍길동 씨는 경기도에 살고있는 김민수 씨를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이 둘은 서로 모른다는 개념을 넘어서 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한다. 그러니까 홍길동 씨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김민수씨의 존재는 모른다. 사실 김민수 씨는 '수 많은 사람들 중 한명' 이지만 홍길동씨와 김민수씨는 서로 얽혀있지 않기에(관측하지 않음) 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관계' 라는 것은 누군가는 우연의 연속 이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선택의 연속 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이미 정해져있는 결과의 대본대로 발생하는 이벤트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건이란 엄청나게 복잡한 연쇄과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카르마(karma)란, 일종의 긍정적인 방향성을 가지고있다. 간단히 말해, 만약 내가 좋은 일을 한다면, 그 일이 되돌아올 것 이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주변에게 좋은 사람이며, 남들의 시선과 관계없이 선행을 베풀며,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불운이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행운이 찾아온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운적인 요소들의 크기는 불규칙적이다. 대표적으로 오타니 쇼헤이는 카르마를 믿는다고 잘 알려져있는데, 오타니의 인생이 잘 풀리고 있는 까닭은 과연 그의 '업보' (karma) 일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일차원 적인 판단이라고 보여진다. 그럼 만약 오타니를 현재 성공의 궤도에 안착시키게 도와준 그의 키나 외모가 지금과 같지 않다면? 그의 가정환경이 이보다 더 불우했다면? 그의 타고난 야구 실력이 지금과 같지 않다면? 그가 지금의 그와 절대로 동일 인물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수많은 변수적 요인들이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관계'라는 통로와 상호작용 한 것이다)  반대로, 오타니가 카르마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경기장에 떨어진 쓰레기를 굳이 줍지 않고, 남들처럼 적절한 수준의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서 현재 지금의 그가 이루어낸 업적을 달성하지 못할까?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끔 나는 이러한 망상을 하게 된다. 만약 그가 경기 도중 우연히 다리가 부러졌고 다시는 경기를 뛸 수 없다고 생각해보자.(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건 위험하긴하지만) 이 때 인과율이란 근육의 긴장 이라던가, 착지를 잘못했다던가 등등 많은 요인들이라 추정할 수 있다. 더 깊게 내려가면 3일전에 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버린 탓 등등..  그럼 이러한 부분적인 문제들은 과연 카르마 에서 비롯되는걸까? 혹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매우 무작위적이고 잔인한 결과인 것일까?

 

 인간은 수많은 세포들로 구성되어 매우 다양한 옵션을 가진 유전자로 결합되어있고, 유전적인 특성과 환경적인 특성이 적절히 결합해 '매우 개인적인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이 '매우 개인적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떠한 값들은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선천적인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상상을 돕자면,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아이의 20년 후 미래는 100x100픽셀의 해상도를 가진 어떠한 존재로 이미 존재하는 상태이고, 시간이라는 축을 따라 달리며 이 해상도가 점점 맑아진다. 군중(crowd)을 확대해보면 사람들(people)이고, 더 확대하면 개개인(person)이다. 여기서 더 확장하면 개인을 이루고 있는 수 많은 관계를 통해 가지게 된 속성들이며, 이 속성들은 정의 내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예민함, 섬세함 등등) 그리고 이 속성끼리는 결합 될 수도 있으며, 고유할 수도 있다. 이번 문단에서 다루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는 '카르마'가 개개인의 속성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종교와 직결된다. 종교란 개인에게 적용되는 우주와 같다. 기독교인에겐 목숨 그 이상의 값어치인 '사후세계'를 다루는 만큼 엄중히 무거운 주제이다. 이처럼 카르마를 믿는다 라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우리는 각자 '나' 라는 관점에서 살아간다. 살아가며 무언가를 감각기관(시각, 청각, 미각 등)으로 '본다'. 뇌는 이 정보를 해석하는데, 이 때 흥미로운 사실은 각자 해석하는 알고리즘이 전부 다르게 작동한다. 비슷한 속성을 가진 집단에서 처리되는 뇌의 해석 알고리즘의 작동이 다소 비슷하게 작동 할 수는 있겠다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속성(위에 언급한 내용) 에 따라 전부 다르게 동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오타니에 더욱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카르마에 대한 긍정적인(선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본질적으로, 카르마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더라도 내 행동은 나의 자유의지대로 선한 영향력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는 사회 집단의 효용성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하게 작용한다. 모두가 카르마를 믿는다면 당연히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펼쳐질 것 같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인간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 카르마의 진가는 여기서 발휘된다. 카르마를 믿고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희소하다. 절대적인 선 이라는 것은 모르겠지만, 악한 세상에서 선한 행위는 희소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중은 오타니의 선한 모습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서. 적어도 지구에서 '가치있는 것'은 희귀하다. 모두가 열망하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희소성은 곧 가치이다. 이것은 진리값이다. 늘 가치있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되었다. 농경사회에서 '흰 피부'는 가치있었다. 귀족들은 노예들을 부리며 햇빛을 피할 수 있었고, 타지 않은 피부는 귀족들에게 일종의 엘레강스(elegance)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검은 피부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도 이러한 곳에서 오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선함' 도 희소하다. 이와 관련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예수'이다. 이 성인은 선함을 넘어 그 무언가를 초월한 존재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개인적으로 그냥 경의롭다 라는 생각이 드는 성경 구절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희소한 '선함'의 연결고리이고, 앞서 말했듯이 선하다는 것은 갈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희소하다. 같은 맥락에서 카르마(karma)또한 일맥상통한다. 비록 교리는 다르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선함' 에 대한 염원이며 '업보' 라는 것은 이에 대한 기대심리 같은 것이 아닐 까 싶다. 기독교에서는 사후세계에서의 '보상'을 다룬다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카르마는 마치 현실세계에서의 '보상' 이라고 보는 것일까? 

 

  지금까지는 타인의 관점에서, 누군가가 나를 바라본다는 입장에서 카르마에 대해 적어보았는데, 지금부터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이야기는 '나' 라는 존재가 주체가 되는 관점이다. 위의 내용에서의 카르마란, 그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혹은 카르마가 개개인에게 어떻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고찰적 탐구였다면, 지금부터는 나 자신, 즉 본인에게 직접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싶다.

 

  카르마를 믿는다면, 남들이 보지 않아도 선한 행동을 세상과 상호작용 해야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절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그 행동을 하는 순간 '나' 는 그 행동을 지켜본다. 앞서 나 라는 존재는 나를 구성하는 감각기관의 요소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때 '나의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감각기관' 과 '나' 는 개념적으로 분리된다. 뇌과학이나 인지심리학같은 학문에서는 다르게 정의할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의 사고 과정에서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싶다. 우리의 시각적 정보의 데이터를  뇌에 전달해 주는 것이 안구의 역할이라면 내가 선한 행동을 했을 때 그걸 보는 '나' 는 타인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선한 일을 할 때, 아무도 몰라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 두 눈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의 집합은 나를 이루는 한 속성으로 변화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자아 형성에 귀착될 수 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존감을 이런 부분에서 충족하기 때문에 (외모나 옷치레 따위와 같은 가벼운 요소가 아닌, 내면에서 힘을 얻는다는 말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 카르마와 같은 선한 행동은 '나' 라는 존재의 구성요소를 '내'가 만드는 행위이다. 반대로 외모와 같은 부분은 타의적으로(유전적) 결정 된 것이며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외모와 같은 요소로 형성된 자존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쉽게 부서질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글을 작성하면서 다시한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인간의 생애주기를 시간이라는 축에 의해 늘려놓은 것이고, 인생 또한 벡터값을 갖는다. 방향과 속력이 있다는 뜻이다. 인과율의 원인과 결과에는 관계로 얽혀있는 수 많은 요소들로 인해 연결되어있는 것이고,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과 운 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카르마와 같은 선함 이라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더 넓은 행운이라는 밭에 씨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 필자와 같은 사람은 가끔 지나치게 냉소적일 때도 있으며, 정보의 과해석의 오류에 빠질 때도 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 더 긍정적인 에너지를 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