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인스타그램을 켜기만 하면 지독한 감성 글귀 모음 게시글에 꼭 달려있는 수식어가 있다.

"구매 링크는 프로필에" 

좋다. 나는 이 광고를 비판하고싶지는 않다. 오히려 새로운 돈벌이가 될 지도 모르는 수단이니 말이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궤변을 늘어놓았는지 직접 체험 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첫 페이지부터 쓸데없는 개소리로 원고를 늘려 자신의 지갑을 두둑히 하려는 저자의 몹쓸 심보에 헛구역질이 났지만 참고 읽어보았다. 

초장부터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본인이 진리를 깨달은 것 마냥 써놓는 글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나무야 미안해"

이어지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이어질 사람이었다면 서로 모르고 살 법한 곳에서부터 어떻게든 만나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인연이 아닌 사람이라면, 서로에게 기대가 충만하고 같은 모형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알아갈 시기를 만나지 못할 것이고, 인연이라면 서로에게 관심이 없고 겹치는 부분이 없더라도 서로를 알아줄 시기를 어떻게 해서든 맞이하여 이어지게 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 관계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론 감히 조정할 수 없다는 것.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배경 그리고 수많은 만남을 통해 정해지게 되어 있다는 것.  

너무 애타게 찾아다니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부질없이 생각하지도 말 것.  

모든 만남을 위한 노력과 관계로 인해 쓰인 시간은 전부 헛된 것 하나 없이 이어질 인연으로 향한다는 사실. 

그것을 잊지 말고 살아갈 것.

- 나를 사랑하는 연습 - 66p

 

 

   드디어 개소리가 나왔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태초부터 맺어지는 인연 따위는 없다. '이어지지 않을 사람이라면 서로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처음 본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건 당연하지. 인생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처음 보는 상대가 운명의 상대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만약 당신이 첫 만남에 그런 기분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 첫눈에 반한 게 아닐까?

  옷 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느니 따위의 숙명론 적인 관점이 위험한 이유는 바로 허무주의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 의 빅터 프랭클 선생님도 이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간단하게 예시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남자에게  "어차피 만날 커플은 만나겠지~ 기다려보면 연락이 올거야~"와 같은 조언을 하는 꼴이다. 이는 타인에게 수동적인 자세를 심어준다. 남자의 결정(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지않게 되는 행동)이 미래 상황의 통제권을 상대방에게 맡긴다는 수동적인 자세가 남녀 모두에게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갖게 되리라 생각된다.

   물론 저 책의 타겟층은 대부분이 여성 독자일 것이며, 평범한 남성이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남성들은 대부분 경제학 서적이나 인문학 등을 즐겨본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건 나태함,책임회피,도피성에 타당함을 주는 책이 "힐링"따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수 많은 나무가 베어지고 특히나 저런 작가들의 통장 자릿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의 개인적인 짜증은 이 쯤으로 하고ㅡ 만약 사회의 대다수가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문명은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문명이 건설되려면 테스토스테론이 필요하다. 경쟁 서열 우위 등과 같은 남성성을 바탕으로 성과 라는 양식이 도출된다. 문명은 성과 라는 양식을 먹고 성장한다. 하지만 이 모든 개념들의 밑바탕에는 수동적이라는 개념이 없다. 원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류는 '내가 먼저 스스로'(원하기에)채집과 사냥을 했고 공통적인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능동성 이야말로 미래였고, 그 미래는 현재 과거가 되었다. 

 

 

미래의 운명따윈 없다. 미래는 내가 결정한다. 그 결정된 미래는 과거가 될 것이지만, 과거와 현재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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